전라감영 이야기

전주 이야기

전라감영 이야기

최고관리자 0 322 01.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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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영은 언제 설치되었을까?

올해(2022)로 전라도 이름이 지어진지 1004년이 된다. 전라도 지명은 고려 초 현종9년(1018)에 강남도(전주목 권역)와 해양도(나주목 권역)를 합쳐 전라도라 칭한 것이 처음이다. 전주에 처음부터 감영이 설치되었던 것은 아니고 임기 6개월의 안찰사(안렴사)가 순력할 뿐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 창왕 원년(1388)에 도관찰출척사(감사)로 부임한 최유경(1343~1413)이 최초 전라감사이다. 안렴사와 관찰사제가 반복되다가 조선 초기 태종때 관찰사제가 정착하면서 감영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감사가 감영에 머물면서 다스리는 체제로 바뀌면서 감영 관아시설이 확대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순력: 관찰사가 자기 관할 내의 각 고을 민정을 시찰하기위해 돌아다님.


전라 감영은 경상감영(상주->대구), 충청감영(충주->공주)과 달리 조선 왕조 5백년 동안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전주에 있었다. 전라감영이란 전라감사가 근무하는 관아라는 뜻으로 완영(完營)이라고 불렀다. 완영이란 전주의 옛지명 ‘완산’에서 나온 말이다.

전라감사 밑으로 도사, 중군, 심약, 검률 등이 있다. 도사는 감사 보조관으로 종5품이며, 중군은 정3품 무관으로 군사업무를 보좌하며, 심약과 검률은 종 9품으로 각각 의약과 법률업무를 관장하였다. 이외에 군관과 아전(행정실무) 등이 있는데 『전라감영지』(1789)에 의하면 군관9명, 영리 39명, 인리 149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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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사 김성근과 육방이속(1884, 조지포크 주한미국공사,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용과 호랑이가 그려진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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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클레이턴 포크(1856~1893, George Clayton Foulk)

조선주재 미국공사관 해군무관 조지 클레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는 일기장과 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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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에 그린 선화당, 일기에는 선화당의 외부와 내부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밴크로프트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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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당에서 승전무를 공연하는 기생들(밀워키도서관 소장), 승전무는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축하하는 춤.

전라감영의 중심 건물은 전라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이다. 선화당 동쪽에는 감영 누각인 관풍각이, 뒷쪽으로는 내아와 연신당이 있다. 선화당 앞쪽에는 내삼문과 비장청이 있다. 이밖에 감사 심부름꾼인 통인들의 대기소인 통인청, 약재를 다루는 심약당, 법률을 다루는 검률당, 한지를 만드는 지소, 책을 출간하는 인출방 등이 선화당 주변에 배치돼 있다. 아전들의 근무처인 영리청과 작청, 진상품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도 있다.

복원된 선화당 내부에는 1884년 전라감영을 방문한 미국 공사관 무관인 조지 클레이튼 포크(George Clayton Foulk)의 사진자료를 6폭의 디지털 병풍으로 재현하고 있다.

전라도 지방의 56군현을 통치하였다.

조선시대 지방통치체제는 8도와 도 아래에 주·부·군·현 등으로 편성되었다. 도에는 감사(관찰사), 그 아래의 군현에는 수령이 파견되어 지방통치행정을 수행하였다. 수령은 군현의 대소에 따라 주에는 부윤, 대도호부에는 대도호부사, 목에는 목사, 도호부에는 도호부사, 군에는 군수, 현에는 현령, 현감이 각각 임용되었다.

조선건국 후 전라도는 제주도 3개 군현을 포함해 총 57개 군현이었으나, 1660년에 진원현이 장성부에 편입되어 조선후기에는 전라도가 총 56개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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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오십육관 지도, 전라도의 56 군현이 표시되어 있다 


전라감사는 막대한 권한의 소유자

전라감사는 2의 관리로 오늘날 도지사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육조판서가 정2품이고, 그 아래 육조 참판이 종2품이므로 감사는 직급 상으로 참판급이다. 하지만 직급상 그러할 뿐, 행정 군사 사법을 총괄하는 막대한 권한의 소유자였다. 군현 수령의 불법을 규찰하고 성적을 평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내의 모든 민정 군정 등의 통치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래서 감사의 임기를 1년 또는 2으로 짧게 하여 그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견제하였다.

전라감사는 전주부윤과 직급이 같았다즉 전주부윤도 전라감사처럼 종2품직이었다조선전기에도 대체로 감사와 부윤이 따로 임명되었지만임진왜란 후에는 주로 겸직제로 운영되었다전라감사가 전주부윤을 겸할 경우 감사가 전주부의 실무들까지 일일이 다 챙겨볼 수 없으므로 종5품의 판관이 파견되어 실질적인 전주부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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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의 부임과 교체 연도를 기록해 놓은 선생안(先生案) 

전주는 출판 도시였다.
완영 책판과 출판문화 -

전라감영에서 출판된 책은 완영본(完營本), 인쇄를 하기 위해 판각한 목판을 완영책판(完營冊板)이라 했다. 춘향가, 열녀춘향수절가, 심청전, 화룡도 등과 같은 판소리계 소설과 조웅전, 구운몽, 삼국지, 소대성전, 유충렬전 등과 같은 소설도 출판되었다. 전주는 수많은 책을 찍어낸 출판의 도시이다완영은 전라감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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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춘향수절가는 19세기 후반에 출판된 고전『춘향전』의 대표적인 이본(異本)이다.
1911년 전주 서계서포(西溪書鋪)에서 간행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라감영 안에 종이를 만드는 지소와 책을 찍는 인출방이 있었으며 책판은 객사 서편 책판고에 보관하였다.
전라감영 책판은 조선말 이후 전주향교에 보관하였는데 현재 5059장이 남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다감영 목판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동학혁명 후 목판을 모두 모아 향교에 보관하도록 한 전라감사 조한국의 공이 크다. 지금은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부채와 대사습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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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청(부채)과 통인청(대사습놀이) 

전주는 부채의 고장이다. 전주부채는 단오날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으로 전라감영에 선자청을 두고 부채를 제작 관리하였다. 고지도에서 보듯이 전라감영 안에는 선자청이 매우 크게 자리하고 있다. 전주에서 최고의 부채가 생산되었던 것은 질 좋은 한지가 이곳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전주는 또한 소리의 고장이다. 전주는 소리꾼들이 모이고, 실력을 뽐내고, 평가받는 곳이었다. 판소리 최고의 등용문인 전주 대사습놀이는 조선후기 전라감영과 전주부영의 통인들이 동짓날 밤 소리꾼들을 불러 경연을 펼쳤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통인은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의 심부름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동학농민혁명 역사가 숨쉬다.

1894년 전라도 일원을 석권한 동학농민군은 북상하여 마침내 427일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그 이튿날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이 전주에 도착해 완산에 진을 쳤다농민군과 관군은 완산전투를 비롯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청군과 일본군이 출병하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함에 따라 민족적 위기 고조되면서 농민군 총대장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은 5월 8일 농민군 철수와 폐정개혁을 조건으로 전주화약을 체결하였다. 화약체결에 따라 각 군현에 폐정개혁을 주도할 집강소를 설치하고 전라감영 선화당에 이를 총괄하는 대도소를 설치하였다. 전라감영 선화당은 관과 민이 협력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폐정을 단행하는 관민협치의 새 장이 열린 곳이다.

전라감영터 발굴조사

전라감영지에 대한 첫 번째 발굴조사는 2005년 도청사 이전 후 2006년 6월부터 2007년 4월까지 시행되었다. 당시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구가 중첩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통일신라시대 유구는 일부 남아있는 적갈색점토층에서 석력, 부석시설, 담장시설, 배수로 등의 유구와 건물지 1동이 확인되었다.

두 번째 발굴조사는 구도청사 철거 후 첫 번째 조사지역을 제외한 전라감영지 전체지역을 대상을 2016년 7월에서 11월까지 진행하였다. 1951년에 소실된 선화당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으나, 그 이전시기의 건물터 적심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1928년과 1937년에 제작된 도면을 근거로 1951년 소실되기 이전이 선화당의 위치를 파악해 볼 수 있었다.

내아 건물의 아래층에 존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건물 기단부에서는 ‘관(官)’자명 기와가 출토되었고, 선화당 북동쪽 하단부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부석시설과 적심 층에서는 ‘전주목관(全州木官)’명 기와와 1350년에 해당하는 ‘경인2월지정 10년(庚寅二月至正十年)’명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는 전라감영지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방행정을 관할했던 관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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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영과 전주부영 (완산십곡병풍도 19세기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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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구가 중첩되어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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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영의 정문 포정루(1909년경, 옛 사진 속의 전주, 전주사람들 2007)

포정문(포정루)의 다른 이름은 팔달문이다. 전주 시내를 관통하고 있는 도로 '팔달로'는 이 문의 이름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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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화당

<참고문헌>
전주학 총서 4집, 14집, 21집, 전주역사박물관
꽃심을 지닌 땅 전주, 전주역사박물관
전라감영 천년의 시간을 꽃피우다, 전라감영 팜플렛
전라감영 이야기, 손상국, 신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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