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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패지관(전주객사)
전주객사(全州客舍) 정면에 걸려있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씌어진 커다란 현판,
크기가 가로4.66m, 세로1.79m, 초서체의 힘찬 필체다.
'풍패(豊沛)'란 본래 건국자의 본향(本鄕)을 일컫는 것으로, 중국 한(漢)나라를 건국했던 유방(劉邦)의 본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었으며, 그러기에 전주를 '풍패지향(豊沛之鄕)' 이라 했고, 전주객사를 풍패지관이라 했다. 전주객사 현판에 새겨진 풍패지관에 얽힌 사연은 중국 대사신(大使臣) 주지번(朱之蕃)이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에 대한 보은(報恩)의 징표(徵表)이다.
*본향(本鄕): 시조(始祖, 맨 처음이 되는 조상)가 태어난 곳
*보은(報恩): 은혜를 갚음
풍패지관이라는 현판 글씨는 중국인 사신 공식외교 사절단 최고 책임자 주지번이라는 인물의 작품이다. 왜 중국 사신은 전라도 전주까지 내려와서 풍패지관이라는 거창한 규모에 거창한 이름의 현판글씨를 남기고 돌아갔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주지번은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장암마을에 살고 있던 표옹 송영구를 만나기 위해 한양에서 내려오던 길에 전주객사에 잠시 들렀다가 기념으로 써준 것이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 당시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온 공식외교 사절단의 최고책임자인 정사(正使)의 신분이었다. 주지번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한양에서는 임금과 대신들이 함께 모인 어전회의에서 그 접대 방법을 놓고 고심할 정도였다. 주지번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고위급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한 주지번이 한양에서 전라도 시골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 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주지번은 표옹의 도움으로 과거에 합격을 했기때문이다. 표옹은 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館)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 그때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다.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이었다. 장작으로 불이나 때는 천한 주제에 남화경을 외우는 게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하찮은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다 암송할 수 있느냐."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자(여비)가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표옹은 이 청년을 불쌍하게 여겨 시험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조선의 과거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알려준 것이다. 그러고 나서 표옹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몇 편을 필사하여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그 후 이 청년은 과거에 합격하였고 바로 이 청년이 주지번 이었다.
전주객사는 이욱동서헌기에 따르면 1473년(성종 4) 시찰사 조근이 전주사고를 건립할 때 객사 건물도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1911년 전주객사, 1912년 금난부에 실려있는 사진>
*금난부의 사전적 의미는 친한 친구의 이름이나 주소 따위를 적은 장부를 말한다.
1912년 전북일일신문사에서 신년과 일본천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만든 책
<1921년 이후 전라북도 물산진열관(산업장려관)으로 이용된 전주객사>
《전주부사》에 의하면 일본은 객사 마당에 벚꽃을 심고 1921년 이후 전라북도물산진열소(산업장려관)로 사용하는 한편 연회장으로 여러차례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1937년 산업장려관이 이전한 뒤 전라북도교육참고관이 설치되었고, 그 사이에 남문의 서쪽에 있던 종각을 이전하고 정원에는 대포와 3층 석탑을 두었다. 1922년 익산 왕궁에서 옮겨온 이 탑은 지금은 덕진공원에 가야 볼 수 있다. 1947년에는 명륜대학(전북대학교 전신)건물로 이용했고 한때 전라북도 공무원 교육원으로 이용했다.
<1930년대 전주객사>
나의 기억 속의 객사는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시장이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항상 시내 중심가에 있는 양품점(미도양품점)을 이용했다. 양품점이란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상호지만 당시에 작은 규모의 백화점이라고 생각하면 맞겠다. 양품점을 가다보면 일반 집들보다 높은 기와지붕이 보이곤 했는데 객사 건물이었다. 지금처럼 길가에 있었던 건 아니어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볼 수 없었다. 객사 뒤쪽엔 3층의 체신청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난 객사 옆 건물 신혼예식장에서 결혼을 했다.
1970년대의 모습을 찾기 위해 신문기사를 검색해보았다.
- 퇴락해가는 전주객사 주변에 가내공업센터, 주택 밀집 창문부서지고 건물도 기울어(1974. 3. 21 경향신문),
- 전주객사의 후원에는 지하1층 지상3층의 전주청사와 3층 예식장이 들어서고 북으로는 4층 철골조의 여관건물이 그리고 정원에는 반공연맹전북지부등이 입주해 있는 3층 빌딩이 들어서있어 사면에서 객사를 위압하고 있다. 그러나 객사는 유리창이 깨지고 벽이 헐린 채 지붕마저 내려앉아 이제 천수를 다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1975. 2. 5. 동아일보),
-전주객사 보물 583호로 지정(1975. 3. 30).
1980년 충정로(동서관통도로) 도로공사와 지하도 공사(1981.9.7. 공사도중 붕괴)등으로 객사 주변이 훤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1988년 8. 23 전주시는 1억9천만원을 들여 옛 체신청사 철거작업 등 전주 객사 정화작업을 추진하는 동시에 경내 조경등을 통해 문화재로서의 가치 뿐만 아니라 도심 속 소공원으로서 정비코자 함.
1990년 1.13 객사 북원 및 정화사업 마무리 16억원의 사업비 투입한 객사 복원 및 정화사업은 526평 규모의 구 체신청 청사를 철거, 영역을 확장했고 주관을 전면 해체 복원.
1998. 11. 17. 전주객사 동익헌 복원 준공
2002.4.20. 전주 객사 해체복원 추진, 문화재청에서 너무 오래돼 뒤틀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전주시 중앙동 소재 전주객사(보물 제583호)를 내년까지 총 12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해체 복원하기로 함. 2002.6.24. 전주객사 해체 보수 착공
<1970년대 전주객사>
객사 동익헌이 헐리고 도로가 개설된 시기를 놓고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전주부사에 실린 1911년 전주군 부사면 지도를 근거로 1914년 시구개정사업으로 동익헌이 헐리고 도로 개설 추정(장명수), 1912년 신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된 금난부에 실린 사진을 근거로 1911년으로 추정(홍성덕)
1911년 전주군 지도 (서쪽 성벽은 헐린 상태이나 동쪽 성벽은 남아있다. 그리고 객사 옆 길은 아직 개설되어있지 않다.
<참고문헌> 사진 속의 전주 백년 (홍성덕), 전주시 60년 일지(전주역사박물관), 성곽발달과 도시계획 연구(장명수), 전주시사(1986),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서문당), 옛 사진 속의 전북(국립전주박물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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