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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흐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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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흐리드

최고관리자 0 3,819 2021.09.19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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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케도니아 오흐리드 

* <이 글은 '북마케도니아'로 국호가 바뀌기 전 답사입니다.>


북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오흐리드호(湖)의 북동쪽 연안에 있다.
9세기 후반에 불가리아인에게 정복되어 슬라브인에 대한 선교(宣敎)의 거점이 되었다.
중기 이후의 비잔틴 미술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북마케도니아 주요 휴양지의 하나이며, 고기잡이와 자동차부품·진주가공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진다.

마케도니아 역사
역사적으로 마케도니아(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세계를 정복했던 때부터)의 대부분은 오늘날 그리스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현재 마케도니아가 사용하는 국명에 대해 그리스인들은 항상 논란을 제기한다. 로마인이 고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인들을 기원전 2세기중반에 정복했었고, 기원4세기 로마제국이 분열할 때 이 지역은 콘스탄티노플이 지배하는 동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슬라브족은 이곳에 7세기에 정착하여 이 지역의 민족성을 바꾸어버린다.

이 지역은 9세기 불가리아인 짜르 시메온(tsar Simeon)에 의해 점령당한다. 그 후 짜르 사무엘(Samuel)의 지배하에서 마케도니아는 강력한 불가리아 국가의 중심이 된다. 1014년 사무엘이 비잔틴제국에 패배함으로써, 마케도니아는 비잔틴제국,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의 국가에 의해 번갈아 지배되는 긴 세월이 시작되었다. 1389년 터키가 세르비아에 대승하여 발칸국가들은 오토만 제국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지역문화 또한 변하였다.

1878년 러시아는 터키를 패배시킨 후, 산 스테파노(San Stefano) 조약에 의해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에 이양한다. 러시아가 발칸반도의 중심에 그들의 강력한 기지를 세우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서방 강대국들은 불가리아에게 마케도니아를 터키에 반환하도록 강요하였다. 1893년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터키로부터 독립투쟁을 위해 마케도니아 내 혁명기구(IMRO: Internal Macedonian Revolutionary Organisation)를 조직하며, 1903년 5월 일린덴(Ilinde) 봉기로 투쟁의 절정을 이룬다. 이 후 3개월 동안 잔인하게 억압 당한다. 민족지도자였던 고체 델체프(Goce Delcev)는 반란이전에 죽었지만 그는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1912년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연합하여 터키에 대항했던 제1차 발칸전쟁이 발발했다. 1913년 제2차 발칸전쟁 때는 그리스와 세르비아가 불가리아를 배척하고 마케도니아를 분할했다. 이런 결과에 실망한 IMRO는 세르비아 왕권파에 대한 투쟁을 계속한다. 이에 대해 베오그라드의 전시정부는, 마케도니아 언어는 물론 마케도니아란 이름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으로 응한다. 일부 IMRO 요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마케도니아에 대한 불가리아의 점령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티토의 빨치산에 가담하다. 전쟁 후 마케도니아는 미래의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완전한 공화국의 지위를 갖게 된다는 것에 1943년 동의한다. 1952년 최초로 마케도니아 문법이 출판되었고 독자적인 마케도니아 정교회의 설립이 허가되었다. 마케도니아인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인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인종집단이라는 것을 인식한 베오그라드 정부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불가리아의 요구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91년 9월 8일 마케도니아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의 결과, 74%가 독립을 원하였다. 따라서 마케도니아 정부는 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다. 처음 베오그라드는 마케도니아 주둔 연방군대를 철수하도록 협조를 했고, 분할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도로와 철로 등이 전혀 파손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중반 유고슬라비아와의 국경지대, 특히 잠재적인 화약고인 코소보와 가까운 지대를 감시할 목적으로 천 여명의 유엔군이 파병되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명칭은 그리스북부 지방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다른 국명을 사용하도록 요구하며 마케도니아의 외교적 승인을 미루었다. 그리스는 만일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마케도니아란 국명을 사용하면, 그들이 오늘날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고대 마케도니아 영토에 대한 권리의 실질적인 합법성을 마케도니아인들이 제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 정부의 지속적인 입장에 따라, 마케도니아는 하는 수 없이 1993년 4월, '잠정적으로' 마케도니아 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FYROM)이란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유엔이 재가해 줄 것을 신청한다.
 2년 동안의 혼란기를 지나 1993년 12월, 강한 그리스의 반대가 있었지만 유럽연합의 6개국과 외교관계가 성립된다. 그리고 1994년 2월 미국도 FYROM를 인정한다. 그러자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경제통상 금지를 선언하고 마케도니아와의 무역항인 테살로니키 항구를 폐쇄한다. 마케도니아가 국기를 바꾸고 국호에 관해 그리스와 협의에 들어 간다는 동의를 한 후인 1995년 11월 통상금지령은 철회된다. 곧 이어 협의가 시작되었으나 키로 글리고로프 대통령이 차량폭발에 의해 암살될 뻔했다. 지금까지 이 난제 해결을 위한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코소보사태를 기억한다. 1999년 3월부터 6월까지 계속되었던 나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코소보 폭격은, 국경을 넘어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등지에서 피난처를 찾는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로 넘쳐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발칸분쟁을 한번에 종식시키겠다는 위협과 함께 세르비아가 마케도니아의 군부대를 폭격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미 가난에 허덕이는 마케도니아에 수십만의 난민이 들어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심각한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많이 쓰이는 키릴문자는 테살로니키 출신의 두 형제 성 키릴(St Cyril)과 성 메토디우스(St Methodius)에 의해 9세기에 개발된 알파베트에 근간을 두고 있다. 이 문자는 오흐리드의 한 수도원에서 규율을 가르치는데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동 슬라브를 거쳐 전파되었다. 거리이름은 키릴문자로만 쓰여져 있고, 도로표시는 키릴과 라틴어 모두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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