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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북마케도니아로 국호가 바뀌기 전에 이루어진 답사 내용입니다. (2015년 8월)
스코페에 도착해서 첫 방문지는 테레사수녀 기념관이었는데,
테레사수녀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돌다리와 광장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위 사진 돌다리(Stone Bridge)는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만들고, 오스만제국 때 재건립 되었다고한다. 시내 번화가와 구시가지를 연결한다.
스코페는 1963년에 1070명의 사망자와 12만 명 이상의 이재민을 내고 시의 약 80%를 폐허로 만들었던 강한 지진이 일어난 후 시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여러 개의 위성 주거지역과 4개의 공업지역을 갖추고 지진에 견딜 수 있는 새로운 도시계획이 구상되어 구시가지 쪽 바르다르 강가에는 북마케도니아 대의기구가 들어 있는 건물과 교육기관, 도서관, 텔레비전 방송국 등이 들어서게 되었고, 신시가지 쪽은 경제 및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재건 후 현대적 건물이 많아졌고 시내에는 로마 시대의 수도, 성채, 성당 등이 남아 있다. 재건 과정에서 이 도시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강한 투르크적인 면모들이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돌다리 아래 쪽에 막 다이빙하려는 여자와 물속으로 막 들어간 사람의 발 조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은 무슨 의미일까?
스코페시민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
한 시민은 해마다 이곳에서 바르다르강에 십자가를 던져 제일 먼저 건져오는 사람이 우승하는 행사가 있는데 그것을 재현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고보니 오흐리드 호수가에 수영복입고 십자가를 들고 있던 남자 조각상이 생각난다. 이름도 만든 사람도 알 수 없는 조형물, 해석의 자유로움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돌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간다.
가는 길에 만난 전통복장을 입고 있는 사람들, 흔쾌히 사진을 같이 찍어준다.
구시가지에는 사람들의 삶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바자르가 있다.
바자르 골목에는 15세기중반(1452)에 지어진 Kapan Han(대상 숙소)가 있었는데 손님과 상인을 위한 44개의 객실을 갖추고, 말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현재는 전통적인 북마케도니아어 음식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Kapan Han을 빠져나와 찾은 곳은 Čifte_Hammam(마케도니아어 : Чифте-амам), 공중 목욕탕이다. 15세기에 지어진 공중 목욕탕은 남성, 여성 룸이 각각 떨어져 있다고 들은 것 같다. 2001년부터 북마케도니아의 국립 미술관의 전시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들어가보지 않았다.
바자르를 빠져나와 스코페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칼레요새로 가는 도중 무라트 파샤 모스크와 정교회 건물을 지나가게 되었다. 가장 아름답다는 모스크는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17 또는 18 세기 초에 지어진 정교회 church of Holly Saviour를 들어갔다. 종탑과 석관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바닥의 대리석 장식문양은 소박하면서도 무게가 있어 보였다. 프레스코와 iconostasis의 아름다움이 놀랍다고 하는데 실내로 들어갈 수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 건물 아래 쪽 벽에 십자가는 성직자의 묘라는 설명을 들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칼레요새는 518년 지진으로 무너진 고대 로마의 도시 스쿠피의 유적일 것으로 추측되는 곳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재건하고 10세기에서 11세기사이에 확대 건설하여 완성하였을 것이라고 하는데 1963년 지진으로 일부가 무너졌다. 2006년 말 정부의 지원으로 발굴과 연구가 시작되어 기원전 3000년경에 사용했던 목관악기와 찰흙 장식품등이 발견되었고 요새 밑에선 집채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 동상
스코페 광장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동상이 있었다. 분명 마케도니아 역사와 관련있는 인물일텐데 기억에 남는 건 알렉산더 대왕 동상이다.
광장은 지금도 조성중이었다.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는 역시 어린이들의 놀이터, 분수가 개장(?)된 걸 처음 본다는 동행한 한인회장님, 마케도니아는 계속 아주 빠르게 관광사업에 매진중임을 알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에는 한국인이 11명(2015년 현재), 4가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북마케도니아와 우리나라는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들리는 이야기는 그리스와의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을 두고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가 서로 자신의 조상이라고 맞서고 있는 가운데, 그의 모습을 본뜬 초대형 동상이 마케도니아에 세워져 있다. 대놓고 이름을 붙이진 않았지만, 동상은 누가 봐도 애마 부세팔루스를 탄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이다. 이탈리아에서 주조된 채 공수돼 조립되는 이 동상은 22m(발판 10m 포함) 높이의 초대형 크기로, 건립 비용만 530만유로(83억원)에 이른다. 평균 월 임금이 440달러에 불과한 마케도니아로서는 상당한 비용 지급을 감수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마케도니아 안에선 니콜라 그루에프스키 총리가 쓸데없는 예산낭비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괜한 민족주의를 조장해 그리스와의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불만도 나올 정도다.
알렉산더 동상 건립은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을 둘러싼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양국 간의 역사적 정통성을 둘러싼 갈등을 보여준다. 마케도니아가 1991년 옛 유고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면서 국명을 마케도니아로 제정하면서, 그리스와의 마찰이 시작됐다. 그리스 정부와 학계는 동상건립에 대해 마케도니아가 자국의 역사유산을 가로채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구유고연방 붕괴 후 그리스 북부지역 명칭인 마케도니아와 똑같은 이름을 국호로 도용하더니 이제는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역사까지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케도니아는 외교적으로는 ‘마케도니아 구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란 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도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마케도니아가 테살로니키 동상보다 훨씬 웅장한 알렉산더 대왕 동상 건립으로 역사논쟁에 쐐기를 박으려 하고 있다.
스코페
바르다르강(Vardar R.)상류에 위치해 있고, 중부유럽과 아테네 사이를 잇는 중요한 통로역할을 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제일 큰 도시로 정치, 문화, 경제 및 학문의 중심지로 마케도니아 인구의 25%이상이 이곳에 거주한다. 도시명칭은 1912년 우스쿠브(Uskub)에서 스코플리에(Skoplie)로 변경되었고, 1950년대 이후 스코페(Skopje)로 불리었다.
기원전 3500년경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해왔으며, 이러한 흔적들은 오래된 칼레(Kale)요새에서 발견된 석기시대 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고대 일리리아족의 중심지였던 스쿠피에서 비롯된 스코페는 4세기에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다르다니아 지구의 중심지가 되었고 518년에는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7세기에는 슬라브족에게 침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9~10세기에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고 1189년 세르비아인들이 처음으로 이 시를 점령하게 되었다. 1392년 투르크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뒤 이 시를 지역 중심지로 삼아 상업요지로 만들었지만 1689년에 오스트리아 군대가 진성 콜레라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이 시를 완전히 불살라버리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다 다시 19세기에 베오그라드-살로니카(그리스) 간 철도가 건설되면서 다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조약에 따라 1913년 세르비아에 합병되게 되었고 1918년에는 신생국인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되었다. 1941년 4월,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독일인들에게 점령당했고 그 후에는 불가리아 군대가 주둔하였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1944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에 통합되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에서 독립되면서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