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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벌치와 코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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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벌치와 코무덤

최고관리자 0 1,498 2021.09.0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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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호벌치 전적비(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호벌치는 정유재란(1597)때 왜적과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선현들의 넋이 서린 곳이다.

임진왜란에서 패한 왜군이 의병들과 군량미 등 군수물자의 보급창이었던 호남을 그냥 두고는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라도로 쳐들어왔다.

서해안을 휩쓸고 다니며 살육과 방화 약탈을 하는 왜군을 맞아 싸운 싸움의 하나가 호벌치 싸움이다. 호벌치는 변산의 한줄기가 고부평야로 향해 뻗어 내린 등성이의 고개로 상서면과 보안면의 경계를 이루는 목이요 요충지이다. 


되놈을 물리친 재라는 뜻으로 왜벌치, 적치, 호치(된재)라 부르기도 하며,또한 당나라 소정방이 이곳에 상륙하여 유진치와 주류성일대 통수부를 설치하였다 하여 생긴지명이라는 설도 있다. 

왜적이 줄포만을 거쳐 부안읍에 쳐들어오자, 채홍국은 김영년등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싸움을 벌였으나 적의 급습을 받고 전사하였다. 그러자 그의 두 아들, 명달과 경달도 나라를 구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적진에 뛰어 들었으나 그들 역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당시 이들과 함께 산화한 의병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5년 8월, 이 곳에 전적비와 함께 순절비를 세웠다. 호벌치 싸움의 전황은 호남절의록, 호남삼강록, 호남도지, 겁암일기 등에 전해지고 있으나, 싸움 시기가 4개월이나 맞지 않아 좀 더 깊이있는 연구가 있어야할 것 같다.


코무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의병으로 인해 전라도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왜군은 정유재란(1597) 때 전라도에 들어와 잔인무도하게 양민을 학살하였다.


 ‘풍신수길(도요도미 히데요시)’은 부하 장수들에게 전공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오라고 했다. 이때 귀ㆍ코를 베어가는 사람을 ‘이비야(耳鼻爺)’라고 했다. 이(耳)는 귀, 비(鼻)는 코, 야(爺)는 남자를 가리킨다. 


이비야(耳鼻爺)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일본 승려 경념(慶念)이 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 나온다고 한다. 가슴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 일기에 의하면 들도 산도 섬도 모두 불태우고, 사람마저 쳐 죽인다. 산 사람은 쇠줄과 대나무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는 자식 걱정에 발을 구르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본다고 했다. 


세상인심이 각박할 때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라 하고, 
어린애들에게 겁주기나 위험한 물건을 만지지 못하게 할 때 ‘이비’ ‘애비’ ‘이비야’ 하는 소리를 종종 한다. 이는 정유재란 이후 만들어진 말로 추측된다.

 

호벌치 전적지에는 코무덤이 있다. 
정유재란 때 일본 오카야마현 비젠시 성주, 로고스게도 역시 조선인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도착하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여서 포상을 받지 못하 고 코는 아무 가치가 없게 되었으나, 영혼의 존재를 신봉한 로고스게는 고향 야산에 조선인의 코무덤을 만들고, 용서를 빌었고, 죽음에 앞서 유언에도 영혼들과 같이 묻어 달라며 사죄 뜻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 의해 400여년간 제사가 치루어졌다고 한다. 이곳 호벌치의 코무덤은 1993년 11월 26일 오카야먀의 코무덤에서 흙을 담아와 호벌치에 묻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 
인터넷상에 자료는 있는데, 부안군지와 호벌치 안내판에는 코무덤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왜? 오카야마현 코무덤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것 때문일까?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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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충사는 호벌치 순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2007년에 착공해 2009년에 완공되었다.
(145위 위패와 무명의사 1위, 합계146위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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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루비


1592년 임진왜란에서 패한 왜군이 조선 선조 30년 다시 쳐들어와 정유재란을 다시 일으키자 도화동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던 이유 선생이 의병을 모아 청등에서 적과 싸우다 순국하니 그 갸륵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유 선생은 함평인으로 1545년 조선 인종1년에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도화동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학문에 힘쓴 선비로, 임진왜란의 국란에는 의병장 고경명, 조헌, 김천일에게 군량과 군기를 보내 지원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왜적이 서해안을 따라 부안으로 쳐들어오자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문하생과 함께 이곳 청등벌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적의 총탄에 전사하고 생을 마치니 선생의 나이 53세였다. 부인 부안 김씨는 이 소식을 듣고 병졸들을 이끌고 죽창으로 무장하고 적진으로 뛰어들어가 싸우다 참혹한 죽임을 당하였는데 두분의 시체를 걷우지 못한 그 제자들이 그분들의 신발과 의복만으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고을 사람들은 선생의 학덕과 충성심 그리고 부인의 충렬의 미덕을 추모하여 타루비를 세워 후세에 귀감으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속에서 없어진 것을 1981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타루비는 옛날 중국 진(晉)나라 양양태수 양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인데 백성들이 그 비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두예가 붙인 이름이다. 또한 이태백의 시 '누역불능위지타 삼역불능위지애'에서 원용한 것으로 애절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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