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돈황 명사산 월아천
중국 둔황 명사산 월아천
2012년 8월 4일 촬영, 월아천은 명사산에 있는 아담한 오아시스.
‘월아’는 중국어로 초승달을 뜻한다.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은 경치가 아름다워서 한나라 때부터 돈황 8경 중 하나로 꼽혔다.
오랜 세월 사막의 모래바람에 의해 사라질만도 한데 잘 버티고 있다.
남북의 길이가 약 150m, 폭이 50m, 제일 깊은 곳은 5m , 월아천의 발원지는 돈황 남쪽에 솟아있는 곤륜산맥으로 눈 녹은 물이 지하로 흘러 비교적 저지대인 이곳에서 솟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천년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마른 적이 없었다는 오아시스 월아천은 최근들어 둔황지역의 관개농업으로 인해 지하수위가 낮아져 물길이 끊겨서 큰 연목을 만들어 그곳에서 물을 끌어다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오랜 옛날 무성한 삼림지대였던 이곳이 어느 날 사막으로 변하자 너무 슬퍼한 하늘의 선녀가 흘린 눈물이 이곳에 떨어져 샘물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월아산장은 실제 사막의 건축양식과는 다른 어색한 중국 강남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지만 1997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막고굴
명사산 동쪽 사암절벽에 남북으로 1,6km에 걸쳐 조성된 600여 개의 동굴이 있고, 그 안에 2400여 개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벽화가 그려져 있고, 둔황 석굴, 둔황 천불동이라고도 한다. 막고굴이 만들어진 시기는 5호16국 시대 전진(前秦)의 지배하에 있던 355년 또는 366년으로 추정되며, 승려 낙준이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것을 시작으로, 그 후 법양에서 원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굴은 5세기 전반에 여기를 지배한 북양의 것으로 그 이전의 것은 후세에 새롭게 굴을 파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막고굴의 북부는 장인의 주거지로서 이곳에는 불상과 벽화가 없다.
통치 기간이 가장 긴 당나라 때의 석굴이 225개 굴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수나라가 97개를 차지한다. 북송 때 서하 지배하에 들면서, 둔황의 가치가 하락하여, 점차 그 수가 적어지고 서하 때의 것은 20개, 원나라 때 석굴이 7개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몽골의 침입과 이슬람의 침입을 거치면서, 둔황은 완전한 쇠퇴해진 도시가 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막고굴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이 막고굴이 다시 한번 주목을 받은 것은, 1900년, 둔황의 문헌이 장경동에서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발견 이후에도 막고굴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그 가치가 인정되고, 보호가 시작된 것은 1945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1965년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문화재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은밀한 보호지시로 추가로 파괴되는 봉변은 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