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포토시
남미 수탈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i)이다.
한때 이곳은 세계 최대의 은광 덕분에 부의 상징이었다.
포토시가 번영했던 시절에는 말발굽까지 은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포토시는 16세기, 17세기 유럽에 은을 공급하는 곳이었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금 · 은 같은 귀금속이 들어오자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유럽 전체의 물가가 상승하였다. 이를 가격 혁명이라고 부른다.
17세기 초 교회 36개, 도박장 36개, 발레 교습소가 14개나 있을 정도로 붑볐다고 한다.
당시 12만 명이 살았다고 하는데, 미국의 보스턴보다 10배나 많은 인구 규모였다.
그러나 세계에 가장 많은 것을 제공하고도 가장 조금밖에 갖지 못한 곳 포토시는 지금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지역에 불과하다.
수크레를 출발하여 포토시에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11월 10일 광장’까지 버스로 이동, 광장에 도착했을 때 도시의 분위기가 어두웠다.
날씨 탓인가? 수크레의 맑은 하늘과 생동감 넘치는 도시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무거운 구름, 결국 숙소를 구하는 도중 비를 만났다.
빗물은 경사진 도로를 따라 급류처럼 흘러 내려갔다.
한 밤중 자다가 가슴이 답답함을 느껴 일어나곤 했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의 고산증세가 나타났다.
낮 동안 광산투어와 조폐박물관 투어하는데는 지장 없었다.
조폐박물관 투어
조금 까다롭게 그룹을 지어 안내원을 따라 다녀야했지만,
사진 촬영은 제지하지 않았다.
(최근 소식에 의하면 사진 촬영, 동영상 촬영시 따로 비용을 지불한다고 함)
현재는 화폐를 만들지 않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나름 의미있는 박물관이었다.
포토시의 광산 투어는 내가 경험한 모든 투어 중에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아픈 투어였다.
왕립 조폐국 주변에 있는 여행사로 들어가 광산투어를 신청했다. 잠시 후 한 청년이 우리를 안내했다.
흙먼지 속을 한참을 달려 어느 민가에 들어갔다.
민가 한쪽 허름한 사무실에서 누런 광산 노동자복으로 갈아입고,
랜턴이 달린 핼멧을 받아 쓰고 주의사항을 들었다.
광부들에게 선물 할 코카잎과 알콜 도수 95도의 술을 구입한 후
‘세로 리코’ 광산으로 향했다.
좁은 갱도로 들어서자 숨이 탁 막혔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허술한 받침목들, 기어들어가야 하는 좁은 곳도 있었다.
깜깜하고 좁은 갱도는 공포스러웠다.
갱도가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붕괴 위험은 있지만 먹고 살기 위해 굴을 파며, 지금도 약 만2천여명의 광부가 일하고 있다 한다.
수호신 ‘엘티오’
’삼촌’이라는 의미의 수호신인 ‘엘 티오(El Tio)’ 앞으로 안내했다.
머리에 뿔이 있고, 얼굴은 사람과 라마가 합쳐진 형상이고,
가운데 남근은 과장되게 불쑥 나와있다.
광부들은 ‘엘 티오’가 안전과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엘 티오 앞에는 광부들이 바친 코카잎과 술병, 담배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일행과 잠시라도 떨어지면 두려움이 커졌다.
희미한 랜턴에 의지한 암흑, 기껏해야 몇 초 떨어졌는데, 그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수레를 미는 광부가 지나간다.
그 중에는 앳된 소년의 얼굴이 있었다.
이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의 절반 이상이 10대의 청소년이라 한다.
식당이나 가게에서 일하는 것보다 세 배 이상 벌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 광부가 된 이 소년들은 20-30년의 세월을 여기에서 보내기도 한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광부들의 평균수명이 40세 전후라고 한다.
포토시의 은 광맥은 1825년에 고갈되었다.
은이 떨어지자 주석이 채굴되었다. 주석도 떨어지자 더는 캐낼 광물이 없었다.
지금도 은의 채굴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누굴 먹여 살릴 수준은 못 된다.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나 지금은 가장 가난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볼리비아 사람들이 포토시를 생각하는 마음은 애틋하다. 이 도시를 자랑하고 사랑한다.
포토시는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갱도 밖으로 나오자 숨통이 트인다. 빛과 공기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투어 가이드는 한쪽으로 우리를 안내하더니 다이나마이트 폭파 시범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다이나마이트 심지에 불을 붙이게 하더니
들고 달려가서 터드린다. 이것으로 광산 투어는 끝났다.
*** 강제 노역 제도인 ‘미따(mita)’제도로 노동력을 착취 당한 원주민들은 가혹한 채굴 과정에서 800만명의 인디오들이 죽었고, 17세기 중반까지 원래 인구의 1/10까지 줄어들었다. 이후 4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좁고 어두운 갱도에서 하루하루 힘겹고 위험한 작업을 이어가는 광부들은 식민의 역사는 끝났지만 일상은 스페인 정복시절과 별 다를 게 없다. 원주민들에게 ‘부유한 산’ 세로 리코는 저주스런 산이었고, 포토시는 그저 이방의 땅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땅에서 유배된 자들이었다. 150년 동안 스페인으로 가져간 은은 당시 유럽 비축량의 3배에 이르렀다. 남미에서 유럽으로 대량 반출된 귀금속은 유럽의 가격 혁명과 상업 혁명의 바탕이 되어 유럽 자본주의 발달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남미에서는 잔혹한 대량 학살과 파렴치한 수탈의 결과로 저발전을 가져왔으며, 또한 그들의 땅과 얼굴, 민족, 문화마저 말살되게 되었다. 두 대륙의 현상은 동전의 앞뒷면이다.